징검다리 같은 인생
![]() ▲ 전 한성대학교 총장권한 대행 황진수 박사, 현) 한국노인복지정책 연구소장, 본지 논설위원© |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 마을 가까이에는 작은 개천이 하나 흐르고 있었다. 번듯한 다리는 없었다. 대신 물 위에 듬성듬성 놓인 커다란 돌들이 두 언덕을 이어주었다. 그것이 우리 마을의 징검다리였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는 늘 조심해야 했다. 발을 헛디디거나 다음 돌을 잘못 짚으면 여지없이 물에 빠졌다. 낮에도 건넜고, 달빛 희미한 밤에도 건넜다. 물살이 잔잔한 날도 있었지만, 비가 내린 뒤에는 돌 위까지 물이 차올라 한 걸음 내딛는 일이 두렵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징검다리에서 인생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다음 돌의 위치를 살피고, 몸의 중심을 잡은 뒤에야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는 습관이 훗날 내 삶의 이정표가 되었다.
학교 진학과 직장의 선택, 결혼과 이사, 자녀 교육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는 징검다리 앞에 서 있었다. 어디에 발을 내디뎌야 할지 망설였고, 때로는 중심을 잃을까 두려워했다. 그래도 한 걸음씩 건너다 보니 어느덧 여든 해의 강을 건너 여기까지 왔다.
다행히 평생 경찰서에 불려 갈 일도 없었고, 견디기 어려울 만큼 사나운 상사나 지도자를 만나지도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내 삶에 놓인 돌들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이제야 깨닫는다.
그러나 나는 대범하거나 용맹한 사람은 아니었다. 남들은 가볍게 넘길 작은 일도 오래 마음에 품었고, 사소한 말 한마디를 며칠씩 되새기며 고뇌하곤 했다. 거센 물살을 단숨에 뛰어넘기보다는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다음 돌을 오래 살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는 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잠시 고이면 고이는 대로, 징검다리를 건너듯 조심스럽게 살아왔다.
공자는 『논어』 「자한」 편에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이렇게 탄식했다.
“서자여사부, 불사주야(逝者如斯夫, 不舍晝夜).”
가는 것이 모두 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쉬지 않는구나.
물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앞선 물이 떠난 자리에는 뒤따르는 물이 밀려오지만, 한 번 흘러간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의 시간도 그러하다. 오늘은 어제가 머물던 자리를 지나고, 내일은 오늘이 떠난 곳으로 흘러온다.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미라보 다리」에서 노래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간다.”
그렇다. 시간도 흐르고 강물도 흐른다. 구름 사이의 달도 흘러가고, 사람의 마음도 흘러간다. 한때 뜨거웠던 사랑도, 가슴 깊이 맺혔던 미움도 세월의 물결을 따라 소리 없이 멀어진다.
가수 혜은이의 노래 「제3한강교」에도 비슷한 여운이 흐른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한강교 밑을.
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 흘러만 갑니다.”
강물은 사람들의 꿈과 사랑, 기쁨과 슬픔을 모두 품고도 아무 말 없이 제 길을 간다. 붙잡지도 않고 밀어내지도 않은 채, 그저 흐르며 세월을 증언한다.
장주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세상사의 깊은 이치를 비유와 우화로 쉽고도 오묘하게 풀어냈다. 훗날 사람들은 그를 장자(莊子)라 불렀다.
어느 날 장주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날아다니며 자유를 만끽하던 그는 자신이 장주라는 사실마저 잊었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난 뒤 문득 알 수 없게 되었다.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속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
나는 과연 누구인가?
여든 해를 살아온 지금도 이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내가 인생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온 것인지, 인생이라는 강물이 나를 여기까지 실어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수많은 사람의 도움과 보이지 않는 은혜가 내 삶의 돌다리가 되어주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삶의 이정표를 따라 세월을 낚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때로는 발이 젖었고, 때로는 물살 앞에서 오래 망설였지만 끝내 깊은 강물에 휩쓸리지 않고 여기까지 건너왔다. 그래서 이제는 지나온 모든 날에 감사하고 싶다. 기쁜 날에는 기쁨을 주어서 감사하고, 힘겨운 날에는 삶의 깊이를 가르쳐주어서 감사하다.
남은 소망이 있다면 크지 않다. 내가 사랑한 대한민국의 앞날이 밝고, 모든 국민이 걱정을 덜며 살아가는 따뜻한 복지국가가 되는 것이다.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이 편안한 세상, 곧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바란다.
그리고 또 하나, 생의 마지막 징검돌을 건널 때까지 남에게 큰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가 떠난 자리에는 원망보다 감사가, 소란보다 잔잔한 물결 하나가 남았으면 좋겠다.
강물은 오늘도 쉬지 않고 흐른다. 나의 젊음도, 사랑도, 눈물도 그 물길을 따라 멀리 흘러갔다. 그러나 삶이란 흘러가 버리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조심스레 건넌 돌 위에는 발자국이 남고, 누군가는 그 흔적을 바라보며 다시 자신의 한 걸음을 내디딜 것이기 때문이다.
가는 것은 모두 이와 같다.
밤낮을 쉬지 않고 흐르되, 그 흐름 속에 한 사람의 생애와 감사가 오래도록 머문다.
서자여사(逝者如斯)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