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향은 어디에 있는가? 산업화·민주화를 넘어, 새로운 시대정신을 묻다.
빈곤과 경쟁, 갈등이 일상이 된 오늘의 사회에서 인간은 여전히 ‘풍요와 행복의 공동체’를 갈망한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부터 유토피아, 대동사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상향이 제시됐지만, 현실은 아직 그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모두가 함께 잘 살고 행복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세워야 할 갈림길에 서 있다.
![]() ▲ 전 한성대학교 총장권한 대행 황진수 박사, 현) 한국노인복지정책 연구소장, 본지 논설위원 © |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빈곤과 고뇌, 배고픔과 갈등이 뒤엉킨 무한경쟁의 사회다. 그렇다면 풍요와 사랑, 넉넉함이 넘치는 아름다운 사회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제임스 힐턴의 소설 『지평선을 넘어서(Beyond the Horizon)』에 등장하는 ‘샹그릴라’ 같은 곳일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꿀과 기름이 흐르는 ‘가나안의 언덕’일까. 플라톤이 상상한 철인(哲人)이 지배하는 ‘이상국가’일까.
장 자크 루소가 말한 자연법 사상에 기초한 자유의지의 계약 사회일까. 토마스 모어가 그려낸, 어디에도 없다는 유토피아(Utopia)일까. 조선시대 소설 『허생전』 속, 가렴주구를 벗어나 평등하게 살아가는 ‘서해의 어느 섬’일까?
중국 한나라 유방에게 천하를 얻게 해주고 자신은 신선이 되겠다며 입산한 장량(張良)의 ‘장가계’일까. 아니면 유교에서 상정한 ‘대동사회’일까. 불교에서 말하는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피안(彼岸)의 언덕일까?
정치인들은 이러한 이상향, 이상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어떤 방법과 제도를 구상해 왔을까. 궁예는 ‘미륵세계’를 구현하려 했고, 조광조는 ‘도덕 국가’를 세우고자 했으며, 정약용은 ‘이상사회’ 속에서 목민관의 덕목을 제시했다.
최제우는 ‘후천개벽적 이상사회’를, 조소앙은 민족·국가·개인의 ‘삼균주의’를 주장했으며, 칼 마르크스는 생산 수단인 토지와 자본, 설비의 공유를 통한 분배 중심 사회를 이상사회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사회를 꿈꾸었던 어떤 시도도 완전한 현실로 구현되지는 못했다. 인간 모두가 편안하고 행복한 사회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재해와 전쟁, 기아, 시기와 질투 속에서 지구촌은 더 불안해지고 있는 듯하다.
현대 사회에서의 이상향은 어쩌면 복지국가 정책과 제도를 충실히 실현한 국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한 복지국가라 하더라도 여러 한계를 안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정치인들은 어떤 이상적 사회를 구상해 왔을까?
이승만은 ‘가부장적 권위형’ 모델로 건국과 전쟁 복구에 힘썼고, 박정희는 ‘교도적 기업가형’으로 경제 개발의 단초를 마련했다. 전두환은 ‘저돌적 해결사형’, 노태우는 ‘상황 적응형’으로 평가할 수 있다. 김영삼은 ‘공격적 승부사형’, 김대중은 ‘지식적 결단형’으로 볼 수 있다.
역대 대통령 모두가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고 세계 10대 강국으로 도약하려는 이상 국가를 꿈꾸며 각자의 시대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 말한 ‘시대정신(Zeitgeist:차이트가이스트)’이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1960~70년대의 시대정신은 ‘산업화’였고, 1980년대 후반 이후에는 ‘민주화’가 그 중심에 있었다.
민주화 역시 이제 40년에 가까운 시간을 지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 이후의 시대정신을 새롭게 세워야 한다. 5,000만 국민이 함께 먹고 살 수 있고, 더 나아가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한 새로운 시대정신.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정치 지도자의 가장 큰 화두이며, 동시에 국민 모두의 간절한 열망이다.


